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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반니 베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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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반니 베넬리는 이탈리아의 로마 가톨릭 성직자이자 추기경이었다. 1921년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사제 서품을 받은 후 교황청 외교관으로 활동하며, 교황 바오로 6세의 개인 비서, 교황 대사 등을 역임했다. 1966년 주교로 서품되었고, 바티칸 국무원 차관보를 거쳐 1977년 피렌체 대교구장이 되었으며, 같은 해 추기경에 서임되었다. 교황 후보로도 거론되었으나, 1978년 두 차례의 콘클라베에서 교황으로 선출되지 못했다. 피렌체 대교구장으로 재직 중 심장 발작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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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반니 베넬리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존칭각하
이름조반니 베넬리
로마자 표기Giovanni Benelli
조반니 베넬리 (1978년)
출생일1921년 5월 12일
출생지이탈리아 베르니오
사망일1982년 10월 26일
사망지이탈리아 피렌체
국적이탈리아
조반니 베넬리 문장
모토Virtus Ex Alto (높은 곳으로부터의 힘)
직위
추기경추기경
교구피렌체 대교구
임명일1977년 6월 3일
종료일1982년 10월 26일
전임자에르메네질도 플로리트
후임자실바노 피오바넬리
서품일1943년 10월 31일
서품자주세페 데베르나르디
주교 서임일1966년 9월 11일
주교 서임자암레토 조반니 치코냐니
추기경 서임일1977년 6월 27일
추기경 서임자바오로 6세
계급사제 추기경
명의 본당산타 프리스카 성당의 사제 추기경 (1977년–1982년)
이전 직책세네갈 교황 대사 (1966년–1967년)
서아프리카 교황 대리 (1966년–1967년)
투수로스의 명의 대주교 (1966년–1977년)
일반 업무 담당 (1967년–1977년)

2. 생애

조반니 베넬리는 1921년 5월 12일 이탈리아 토스카나 베르니오에서 태어나 다음 날 세례를 받았다.[1] 피스토이아 신학교, 교황청립 그레고리오 대학교, 교황청립 외교관 아카데미에서 공부했으며, 1943년 10월 31일 사제 서품을 받았다.[1] 1950년 8월 1일 조반니 바티스타 몬티니(훗날의 교황 바오로 6세)의 개인 비서가 되었고,[1] 이후 아일랜드, 프랑스, 브라질, 스페인 주재 교황 대사관에서 근무했으며, 유네스코 교황청 대표 참관자로도 활동했다.[1]

1966년 6월 11일 투수로의 명의 대주교이자 세네갈 주재 교황대사로 임명되었고,[1] 1967년 6월 29일 국무원 부원장에 임명되어 교황 바오로 6세와 긴밀히 협력했다.[1] 교황 바오로 6세 사후 콘클라베에서 유력한 교황 후보(파파빌레)로 거론되었으나, 교황 요한 바오로 1세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게 패배했다. 1982년 10월 26일 피렌체 대교구장으로 재직 중 심장마비로 선종했다.[1][2]

2. 1. 젊은 시절과 사제 서품

조반니 베넬리는 1921년 5월 12일 이탈리아 토스카나 베르니오의 포졸레에서 루이지와 마리아 베넬리 부부 사이에서 다섯 자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삼촌 구이도는 존경받는 프란치스코회 수도사였다.[1] 태어난 다음 날인 5월 13일에 세례를 받았다.[1] 1931년 피스토이아 신학교에 입학하였으며, 나중에 교황청립 그레고리오 대학교와 교황청립 외교관 아카데미에서 공부했다. 1939년 12월 23일 삭발례를 받았으며, 1943년 10월 31일 주교 주세페 데베르나르디에 의해 사제 서품을 받았다.[1] 당시 그의 나이 22세로, 사제 서품을 위한 교회법적 연령인 24세에 도달하지 못했기에 특별 면제를 받았다.[1] 베넬리는 1947년 그레고리오 대학교에서 학업을 마쳤으며, 1950년까지 로마에서 본당 사목 활동도 했다.

2. 2. 교황청 외교관

조반니 베넬리는 교회 내에서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아 곧 로마 교황청에 들어가게 되었다. 1950년 8월 1일 조반니 바티스타 몬티니(훗날의 교황 바오로 6세)의 개인 비서가 되었으며,[1] 1950년 7월 16일 몬시뇰이 되었다. 조반니 베넬리는 아일랜드 주재 교황 대사(1950–1953), 프랑스 주재 교황 대사(1953–1960), 브라질 주재 교황 대사의 감사원(1960–1962), 스페인 주재 교황 대사의 고문(1962–1965), 유네스코 교황청 대표 참관자(1965–1966) 등으로 부임하였다.

2. 3. 주교 서품과 국무원 활동

1966년 6월 11일, 조반니 베넬리는 투수로의 명의 대주교이자 세네갈 주재 교황대사로 임명되었다.[1] 그해 9월 11일에 국무원장 추기경 암레토 조반니 치코냐니로부터 주교 서품을 받았으며, 피에트로 시지스몬디 대주교와 마리오 롱고 도르니 주교가 공동 서품자로 참여했다. 이러한 임명은 그에게 문맹 퇴치와 평화 및 경제 발전을 위한 교회의 사업에 깊은 관심을 갖게 했다.[1]

1967년 6월 29일, 국무원 부원장에 임명되면서 다시 로마 교황청에 등용되었다.[1] 치코냐니가 나이가 너무 많아 대부분의 임무를 수행할 수 없었기에, 그 임무는 베넬리에게 돌아갔다. 그는 그의 옛 스승이자 당시의 교황 바오로 6세와 긴밀히 협력하며 이 직책을 10년 동안 유지했다.

국무원 차관보로서 공격적이고 거의 권위주의적인 재임 기간 때문에 성좌에서 "베를린 장벽"[2]과 "바티칸 키신저"[3]라고 불렸으며, 더 선임된 로마 교황청의 고위 관리들이 그를 통해 업무를 처리하도록 했다.

2. 4. 교황 후보

교황 바오로 6세가 선종하자, 그의 심복이자 이탈리아인이었던 조반니 베넬리 추기경이 후임 교황으로 거론되었다.[8][9] 그는 1978년 8월과 10월에 개최된 콘클라베에 강력한 교황 후보이자 선거인 추기경으로 참석했지만, 교황으로 선출될 만큼 충분한 표를 얻지 못했다. 8월 콘클라베에서 베넬리는 막판에 알비노 루치아니 추기경을 지지하여 루치아니 추기경이 교황 요한 바오로 1세로 선출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선종하였다.[4][5]

교황 요한 바오로 1세가 선종한 후, 베넬리는 바오로 6세와의 긴밀한 관계와 이탈리아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다시 유력한 교황 후보(파파빌레)로 여겨졌다. 그는 1978년 8월과 10월 콘클라베에 추기경 선거인단의 일원으로 참석했다. 1978년 10월 콘클라베에서 그는 주세페 시리와 함께 유력한 이탈리아인 후보였으나, 10월 16일 카롤 보이티와에게 패배했고, 보이티와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되었다.

2. 5. 말년과 죽음

조반니 베넬리는 피렌체 대교구장으로 재직하던 중 심장발작으로 선종하였다. 향년 61세였다. 1982년 10월 26일, 아고스티노 카사롤리가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에서 그의 장례 미사를 집전하였고, 그의 유해는 같은 성당에 안장되었다.[1][2]

3. 기타

2007년 연극 '마지막 고해'에서 베넬리는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4. 참고 문헌

Luis Pancorboes의 저서 "베넬리 몬시뇰"에서 조반니 베넬리에 대한 내용을 참고했다. 해당 내용은 343~353쪽에 수록되어 있으며, 출판사는 세드마이, 출판 위치는 마드리드이다.[1]

참조

[1] 뉴스 Giovanni Cardinal Benelli Dead https://www.nytimes.[...] The New York Times 1982-10-27
[2] 간행물 The Pope's Powerful No. 2 https://web.archive.[...] 1969-03-14
[3] 간행물 Recent Events https://web.archive.[...] 1982-11-08
[4] 간행물 In Rome, a Week off Suspense https://web.archive.[...] 1978-08-28
[5] 간행물 A Swift, Stunning Choice https://web.archive.[...] 1978-09-04
[6] 간행물 The Pope's Powerful No. 2 https://web.archive.[...] 1969-03-14
[7] 간행물 Recent Events http://www.time.com/[...] 1982-11-08
[8] 간행물 In Rome, a Week off Suspense http://www.time.com/[...] 1978-08-28
[9] 간행물 A Swift, Stunning Choice http://www.time.com/[...] 1978-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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